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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아름다운 까닭(성숙불씨 730호)

일산테스 2021. 4. 7. 18:05

봄꽃이 아름다운 까닭

이택호(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내가[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고향의 봄>이다. 이 중에서도 살구꽃은 복숭아꽃, 진달래꽃과 더불어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진달래꽃이 피고 난 후 벚꽃에 연이어 살구꽃이 핀다. 4월쯤에 피어나는 담홍색의 살구꽃이 나무 가득 피어난다. 본격적으로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이기도 하다.

 

옛 시골의 고향 마을 풍경을 떠올리면 으레 살구꽃이 핀 모습이 보인다. 소박하게 둘러쳐진 흙담 뒤덮듯 피어난 연분홍 살구꽃이 장관을 이룬 모습이 떠오른다. 조선 숙종 때 거제도에 귀양을 가서 살아야 했던 문신 김진규에게도 살구꽃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고향의 꽃이었다.

 

“매화는 반쯤 지고 살구꽃이 피어나니 / 바다 밖 봄빛은 나그네의 마음 설레게 하네 / 멀리 고향 집 뜰 북쪽 담장에 선 그 나무 그립구나 / 아름다운 몇 그루 나무, 내가 손수 심은 것인데…”

 

확실히 살구꽃은 외로움에 지친 나그네에게 고향의 따스함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움의 꽃이다. 이호우 시인(1912~1970)도 <살구꽃 핀 마을>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이처럼 봄꽃은 고향의 정감을 느끼도록 한다. 찾아갈 고향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난관과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는다. 봄꽃이 아름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향과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사람들은 꽃의 자태나 향기가 아름답다고 환호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보이는 꽃의 아름다움은 한시적이며 단명한다.

 

보이지 않는 봄꽃의 아름다움은 ‘춘화(春花)현상’에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호주의 시드니에 사는 한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신의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이듬해 봄이 되어서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무성했지만, 꽃이 전혀 피질 않았다.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질 않는다는 것이다. 봄꽃은 겨울의 혹한을 견디어내는 인고의 세월을 거치기 때문에 더 장하고 아름답다.

 

T. S.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라고 한 것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라는 춘화현상의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봄꽃이 아름다운 까닭은, 모든 꽃이 그러하듯이 꽃의 향기나 자태는 한시적이며 단명하지만, 생명의 창조 질서의 순환과정에서 보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물러나는 용퇴의 모범을 보인다는 점에서 감동스럽다. 조화(造花)는 잎새를 무성하게 피지도 못하고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 죽어서 다시 사는 질적 변증의 부활 꽃이 아름다운 것이다.

 

봄꽃이 무성한 계절이다. 우리네도 누군가에게 희망의 봄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공을 이룬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게 물러나는 ‘자리 비움의 미덕’을 배웠으면 좋겠다.

 

- 철학문화연구소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의 <성숙의 불씨> 730호(2021.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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