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필법/허영숙 끝물 이파리 모두 떨어져 나간 나무는 y로 총총 엮인 거꾸로 선 싸리비 구름 몇 점 떨어진 하늘을 쓸어낼 듯 서있다 등에 수많은 y를 업고 있는 나무 저것의 힘으로 잎은 피었다 진다 y에 다시 y를 업느라 휘어진 채 허공을 키우고 있는 가지의 획을 읽다가 빈 집 같은 내 등을 읽는다 맨 처음 내가 기댄 곳은 어머니의 등이다 어머니는 등 기울여 나를 업어 키웠고 등이 휘도록 지게를 업은 아버지 덕분에 나도 필 수 있었다 기울여야 업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y의 필법 평평한 내 등에도 누군가 배꽃 같은 슬픔을 기대어 온 적 있다 휘면 무너질까 등 돌린 적 있다 그때 나를 기울여 업어주었더라면 기억의 근처에 옹이를 지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무의 일생은 기대오는 가지를 업고 잎을 피워내다 가는 것 앓다가 터득한 나무의 필법을 따라 쓰는데 등에 누가 업힌다 막 눈 뜨기 시작하는 생장점 y의 순(筍 )이 온 몸에 번지고 있다
허영숙 시인
경북 포항 출신
부산여자대학 졸업
2006년 <시안>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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