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노천명
망 향(望鄕)
- 노 천 명 -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론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등잔 심지를 돋우며 돋우며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굴레 산에 올라 무릇을 케고
활나물 장구채 범부채를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애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던
촌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라비아서 온 반마[班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촌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고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노천명 (1912~1957)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나, 어릴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하게 되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창작 활동을 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이 유명하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으로서 같은 친일 시인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후에도
우익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50년 북조선의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익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 투옥되었다.
모윤숙 등 우익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 받아 복역했으며
몇개월 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1]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다.
노천명과 절친한 작가 최정희가 시인 김동환과 사귄 것과 함께 문단의 화제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유진오가 소설화하여 묘사한 바 있다. 김광진은 광복 후 가수 왕수복과
함께 월북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의 천주교 묘지에 언니와 함께 묻혀 있다.
내고향 서산 해미 공군 20전비 골프장에서 동네 뒷산 가야산 문다래미를 향해
백구를 날리는 순간, 그 산골 등잔불 밑에서 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처지나간다. 내 젊은 꿈이 영글어가던 가야산 수원골이 보인다.
지난 11. 1(목)과 11. 2(금) 1박 2일로 동기회 서해안선 골프투어 첫날, 동기생들과
해미비행장에서 한 게임하고 서평택 해군콘도에서 1박하고 증설된 만포대 골프장에서
거리, 탄도, 방향의 3위1체를 위해 고군분투했다.(강신득, 민병로, 이재영 동반 라운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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