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자료

존재지향의 삶과 소유지향의 삶

일산테스 2009. 3. 24. 20:52

 


존재지향의 삶과 소유지향의 삶

 

대령 이택호(27기, 철학 교수)

    담 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 두개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이 시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오동꽃’이라는 작품이다.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가람의 여유와 안목이 놀랍다. 왜 그는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다시 바라보았을까?

흔히 사람들은 꽃이 만개하여 자태를 한껏 뽐내며, 향기 짙은 꽃내음을 풍기고 있는 동안만 그 꽃을 사랑한다. 그러나 꽃이 영원토록 지지 않고 피어 있다면 그것은 꽃다운 꽃이 아니다. 꽃이 떨어저야만 열매를 맺는 것이 창조주의 섭리 안에 있는 자연법칙이요, 역사발전의 원칙이며, 또한 생명이 생성·진화하는 원리이다. 소리없이 지고 있는 오동꽃에서 조차 이러한 존재의 법칙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지향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의 모습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이들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자신이 성공하여 이름을 날린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을 알아보고 존경할 줄 아는 사람도 역시 ‘존재지향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존재지향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사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혜와 교훈을 얻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사람의 사람 대하는 방식도 판이하게 다르다. 권력, 재산, 명성 등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오직 인격적 진실성을 사랑한다. 그는 소위 ‘지는 해’, ‘뜨는 해’, ‘지는 별’, ‘뜨는 별’ 등을 저울질하여 줄을 서는 소인배의 삶을 경멸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소유지향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사물과의 관계를 상품적 가치로 환원하여 본다. 얼마짜리 물건인가? 내가 갖게 된다면 얼마의 이득을 얻게 되는가? 이러한 물음들이 그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는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바라볼 여유도 관심도 없다. 지는 꽃에서는 아무런 현금가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유지향의 삶을 사는 사람의 인간관계 또한 타산적이다. 나에게 이득이 될만한 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만이 추종의 대상이다. 인격과 실력은 번거로운 치장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러한 사람들은 지금도 소위 잘나간다고 하는 사람의 집 앞에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강자에게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아첨을, 약자에게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세도를 뽐낸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면 감탄고토(甘呑苦吐)의 처세로 신속하게 변신한다.

그런데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고자 매일 다짐하는 화랑대의 아기별들은 분명 ‘존재지향의 삶’을 택한 젊은이들이다. 나는 이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평생토록 도덕적 진실성, 정정당당한 경쟁, 타인의 인격과 소유권에 대한 존중, 그리고 이러한 삶을 유지할 의무와 책임을 지도록 단련하는 명예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예로운 삶은 언제나 도전과 시련이 따르기 때문에 험난한 정의의 길이다. 어떠한 유혹에 직면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과 불굴의 정신을 유지토록 하는 것이 명예의 최저 기준이다.

생도들이 ‘존재지향의 삶’을 다시 한번 더 결단하는 새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치환 님의 시 ‘바위’의 숨은 뜻을 함께 음미하고자 한다. ‘소유지향의 삶’에 대한 충동과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의 기개와 호연지기를 배우자.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非情)의 함묵(含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육사신보 2002년 1월호 교수단상)